“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또는 믿고 있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존 버거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만난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문제를 볼 때 ‘이미 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요. 익숙한 내러티브는 세상을 빠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때로는 그 익숙함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깁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개인의 부주의로 보면, 피해자가 놓인 상황과 범죄가 작동하는 구조는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자립준비청년의 자립을 혼자 힘으로 일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관계 맺는 사람으로 성장한 모습은 마치 오답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찾는 해법도, 만들고자 하는 변화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문제를 잘못 바라보면 아무리 애써도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그대로 남겨질 수 있습니다.
진저티프로젝트가 현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이처럼 익숙한 내러티브와 실제 사이의 간극입니다. 그래서 당연하게 여겨온 질문을 다시 던지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직접 들여다보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에는 진저티프로젝트가 여러 현장에서 무엇을 다르게 보고자 했고, 어떤 변화를 만들고자 했는지를 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보이던 것이 다른 방식으로 보이는 인사이트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진저티프로젝트 안지혜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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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D U C A T I O N
청년들의 문제정의실험실 <KB라이프소셜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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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갖고 있던 가설이 깨지는 순간을 설계하다
올해 진저티는 KB라이프생명사회공헌재단과 함께 청년 사회문제 탐구 프로그램 〈KB라이프소셜랩〉 1기를 운영했습니다. 29명의 청년이 6개 팀으로 나뉘어 6주 동안 돌봄·생명·시니어 분야의 사회문제를 탐구했어요.
이 프로그램은 해결책을 만드는 것보다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했습니다. 참여자들이 꼭 경험했으면 했던 것은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사회의 기존 시선이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로 문제를 다시 정의해 보는 것. 다른 하나는 시스템 사고로 현상 너머의 원인과 구조를 살피며 문제를 입체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다시 정의하다
진저티는 프로그램 전체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문제정의가 계속 업데이트되도록 설계했습니다. 2회차에 세운 첫 가설은 이해관계자 매핑과 시스템 매핑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현장 인터뷰를 다녀와 그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 내내 고쳐지고 구체화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내러티브도 함께 바뀌어 가길 바랐습니다. 최종 리포트 역시 해결책 제안보다, 사회가 당사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당사자가 실제로 겪는 문제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구조로 구성했습니다.
실제로 참여자들은 탐구를 거치며 문제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위기임산부를 탐구한 팀의 한 참여자는 인터뷰를 하며 숫자와 데이터 뒤에 각자의 삶과 선택, 잘 드러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요. 노인 돌봄을 탐구한 팀의 한 참여자는 두세 명의 인터뷰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처음엔 의심했지만, 인터뷰를 마친 뒤 제도와 정책에만 기대지 않고 노인들 사이의 관계를 넓히는 방향으로도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기업과 제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봐 왔던 그는 이번 활동으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다고 돌아봤습니다.
문제를 보는 방식뿐 아니라, 당사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고립·은둔 청년을 탐구한 팀의 한 참여자는 효율과 성과를 중심으로 답을 찾다 보니 사람을 수동적이고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봐 왔다는 걸 깨달았고, 당사자도 자기 삶을 꾸려 가는 능동적인 주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경계선 지능 청소년 문제를 탐구한 팀도 처음에는 이 문제를 "법적 범주가 없어 생기는 교육권 침해"로 정의했지만, 현장의 교사를 인터뷰한 뒤 당사자를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이 오히려 자립을 막는다고 다시 정의했어요.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구조를 보게 하다
두 번째로 다룬 것은 시스템 사고입니다. 참여자들은 사회문제를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단순하게 보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구조와 사회적 통념, 요소들 사이의 관계까지 볼 수 있도록 여러 방법론을 직접 적용해 봤어요. 문제의 층위를 내려가 보는 아이스버그 맵핑,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 나무(problem tree), 당사자를 둘러싼 관계를 그리는 이해관계자 매핑, 요소 간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인과 루프 맵핑 등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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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지능 청소년의 교육 소외
구조를 분석한 인과 루프 맵
위 맵에는 제도뿐 아니라 경계선 지능 학생을 '모자란 사람'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도 하나의 요소로 들어가 있습니다. 문제를 시스템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인식과 태도 역시 그 구조의 일부이고, 그래서 그 문제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보이기 시작해요. 요양시설 입소 노인의 정서를 탐구한 팀의 한 참여자도 탐구를 마치며 자신의 태도를 돌아봤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딱딱하고 단편적으로" 바라봤고, 나와 직접 관련 없는 일은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며 넘겨 왔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생각보다 나부터 바뀔 수 있는 점이 많았다고 적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로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그 구조를 분석하면서, 여섯 팀은 사회문제를 개인의 결핍이 아닌 관계와 구조의 문제로 다시 읽어 냈습니다. 해법보다 문제를 먼저 들여다본 이 경험이, 청년들이 앞으로 어떤 사회문제를 만나든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한 참여자의 회고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소셜랩을 함께한 친구들이 남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경험을 한 것처럼 작게는 모든 대학생, 넓게는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서로의 문제를 고민하고 합의점을 찾는다면 생각보다 사회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다." _ KB라이프소셜랩 1기 참여자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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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 P A C T
<보이스피싱제로 성과 연구> 임팩트 리포트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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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티프로젝트는 신한은행이 후원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굿네이버스, 경찰청, 금융감독원이 함께 협력한 국내 첫 보이스피싱 피해자 통합지원 및 예방 사업 '보이스피싱제로'의 3년간 성과를 연구해 임팩트 리포트로 발간했습니다.
보이스피싱은 오랫동안 "속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왔어요. 개인의 부주의와 판단 착오가 만든 문제라는 인식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죠. 그 안에서 피해자는 생계와 법적 절차, 마음의 상처를 홀로 감당해야 했고, 범죄가 지나간 자리에서 회복을 돕는 곳도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보이스피싱제로’ 사업은 생활비·법률·심리 지원부터 예방교육, 피해보험, 캠페인까지 아우르며, 피해 이후의 회복을 처음으로 사회의 과제로 꺼내 놓은 사업입니다.
선례가 없는 사업인 만큼, 연구진은 지원 규모를 나타내는 숫자만으로는 이 사업의 가치를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인과관계가 확인된 항목은 보수적으로 계량해 사회적 가치를 산출하는 한편, 숫자에 담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변화를 이야기로 밝히는 데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연구를 이끈 질문은 두 가지였어요. "범죄가 끝난 자리에서 피해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3년간 다져온 국내 첫 피해자 통합지원은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가"
3년의 발자국, 변화로 보다: 네 겹의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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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이 남긴 변화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해 파문처럼 바깥으로 번졌습니다. 연구진은 그 파문을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네 겹의 원으로 정리했어요.
- 피해자: 홀로 감당해야 했던 피해에서 →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되는 구조로
- 관계 기관: 각자의 소관 안에 머물던 역할에서 → 하나의 사회문제 앞에 함께 선 협력으로
- 대응 생태계: 수사와 예방 중심의 대응에서 → 피해자의 회복을 바라보는 대응으로
- 사회: "속은 사람 잘못"이라는 시선에서 → 누구나 대비해야 할 보편적 위험이라는 관점으로
이렇게 읽어주세요
리포트가 제안하는 관점은 하나입니다. 이 사업이 한 일의 상당 부분은 무언가를 더해준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막아준 것이라는 점이에요. 응급처치가 환자를 건강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어떤 치료도 시작될 수 없듯, 막아낸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에 늘 실제보다 작게 이야기됩니다. '얼마나 나아졌는가'가 아니라 '그 지원이 없었다면 무엇을 잃었을까'를 물을 때, 이 사업의 가치는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보이스피싱제로 사업은 이제 마무리되지만, 처음 만든 통합 지원 체계와 협력의 경험, 그리고 피해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이야기는 다음 시도를 위한 토대로 남았습니다. 피해자 지원 정책을 설계하는 분, 여러 기관이 손잡고 사회적 난제를 풀어가고자 하는 분, 그리고 "보이스피싱은 당한 사람 잘못"이라고 무심코 생각해 온 우리 모두에게 이 리포트를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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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T W O R K
「판을 바꾸는 협력」, 그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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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판을 바꾸는 협력」 연구 보고서가 발간된 뒤, 연구가 던진 화두는 사회혁신 생태계 곳곳의 대화로 번져 갔습니다. 보고서를 함께 읽는 공론장으로, 또 지역의 협력을 그려 보는 워크숍으로, 연구는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현장에 닿고 있는데요. 그 두 장면을 전합니다.
다섯 번의 아침이 남긴 질문, 임팩트 조찬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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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한 달간 매주 월요일 아침, 「판을 바꾸는 협력」을 한 챕터씩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론장 〈임팩트 조찬모임〉이 나이오트 주최로 열렸습니다. 연구보고서에 담긴 이야기를 각자의 현장 경험에 비춰 보고, 앞으로 함께 해볼 일을 상상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여러 회차에 걸쳐 나온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모였습니다.
먼저 실패와 모호함을 말할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성공 사례를 나누는 자리는 많지만, 잘 안 된 경험과 그 과정을 꺼내 놓을 자리는 거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과공유회가 아닌 '과정 공유회'를 열어, 서로의 시행착오를 모아 오답 노트를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 이어졌습니다.
과정을 쉽게 꺼내 놓지 못하는 이유를 짚다 보니, 이야기는 자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협력이 자금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지다 보니, 문제를 함께 풀기보다 누구의 성과로 보일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생태계 안에서조차 미션에 필요한 돈을 건강하게 말할 언어가 없다는 데에도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조직 바깥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로 모였습니다. 개별 조직의 이해관계와 평가에서 조금 떨어져, 소속을 내려놓고 함께 실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그곳에서 시작된 작은 시도가 각자의 조직으로 다시 이어진다면, 생태계 전체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도 함께 나왔습니다.
이번 조찬모임은 연구가 짚어낸 생태계의 고민과 과제를 각자의 현장에서 다시 묻고 답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문제를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어떤 협력의 실험을 해볼 수 있을지 함께 상상하는 데까지 이어졌어요. 마지막 회차에서는 ‘우리끼리 하는 작은 펀딩’, ‘문제 하나를 골라 함께 그려 보는 역할 지도’, ‘과정과 시행착오를 나누는 자리’처럼 실제로 시도해 볼 협력의 실험들을 제안하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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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에서 함께 그린 판, 판을 바꾸는 협력 워크숍
보고서의 제안은 지역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세종여성플라자의 요청으로, 세종시 여성정책네트워크 여성리더십워크숍 자리에서 〈판을 바꾸는 협력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서로 다른 단체와 자리에서 활동해 온 세종의 여성 리더들이, 공동의 비전을 향해 어떻게 더 연결되고 협력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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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들은 먼저 "나는 [누구]가 [어떤 상태]가 되도록, [무엇]을 바꾸고 싶다"라는 문장으로 각자의 활동을 정리했습니다. 서로 다른 단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소그룹에서 나눈 뒤, 분야는 달라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문제는 무엇인지, 이 테이블이 함께라서 다룰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인지 찾아 조별로 공동의 목적을 한 문장으로 모아 발표했어요. 이어서 보고서의 다섯 가지 레버리지 포인트와 열다섯 가지 역할을 바탕으로, 지금 하고 있는 역할과 협력이 필요한 역할을 지도 위에 붙이며 세종 여성운동 생태계의 판을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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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 참여자들이 서로의 활동에 깊이 빠져들어 귀 기울이고, 그 안에서 연대의 지점을 찾아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시스템은 거대하고 복잡하지만, 그 변화는 결국 시스템 안에 있는 수많은 변화의 주체들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는 보고서 속 문장을 현장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판을 바꾸는 협력」은 발간으로 끝난 보고서가 아니라, 이렇게 여러 현장의 대화를 열고 새로운 협력을 시도하게 하는 출발점이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진저티프로젝트는 이 연구가 더 다양한 현장에서 협력의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앞으로도 대화의 도구로 다듬고 발전시켜 가고자 합니다. 사회혁신 생태계 곳곳에서 일어날 협력의 실험들을, 앞으로도 함께 지켜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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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the Unseen'
오늘의 진저티-타임 읽어보니 어떠셨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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